• top30
  • 1920
  • 1930
  • 1940
  • 1950
  • 1960
  • 1970
  • 최신추가앨범
  • 음악이야기
  • 노래방
  • 이철의 전쟁 (0) - 오케레코드와 현송자, 그리고 배정자
  • 작성자 : 김광우
  •  목포의 눈물(1935년 9월,오케레코드 1795A)


     

       오케레코드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눈물젖은 두만강, 애수의 소야곡...

    아직도 우리 귀에 익숙하게 남아있는 이 노래들은 일제 강점기 오케레코드(Okeh Records)에서 발표되었다. 오케레코드는 고복수, 이난영, 김정구, 남인수, 장세정 등 톱가수와 박시춘, 손목인, 김해송, 조명암 등 창작자들이 속해있었으며 조선최고의 흥행사로 불리던 이철이 운영하던 회사이다.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 부부(1930년대, 왼쪽이 부인 현송자)


    2009년에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으로 문화원형디지털화 사업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을 전주대학교와 함께 진행했다. 그때 정리했던 자료들이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오케레코드> 관련 대부분의 근간이다. 다른 과제와는 달리 방대한 이미지와 멀티미디어 자료를 구축하여 차별화된 성과를 냈지만 일부 이용자들이 부주의하게 잘못 인용하거나 오류를 재생산하고 있어 안타깝다.


    워낙 드라마 같은 내용이 많고 등장인물마다 논쟁거리도 작지 않지만 우선 배정자와 현송자의 관계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 글의 사건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이며 대표적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이기 때문이다. 


    현재 인터넷을 검색하면 많은 글에서 확정적으로 배정자와 현송자를 모녀관계로 언급하고 있다. 민족반역자, 요화, 동방의 마타하리 등 갖가지 수식어를 동반하는 배정자는 워낙 많은 관심을 끌어 당대에도 신문에 기획기사가 연재될 정도의 이슈메이커였으며 사후에도 드라마와 영화로 단골 등장했다. 근래 들어서는 신문기사에서도 오케레코드 설립자 이철의 부인인 현송자의 모친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위키백과에서는 현영운과 배정자 사이에 두 딸이 있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실제로 현영운에게는 학자와 송자 두 딸이 있다.

     


       현송자와 배정자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재까지 밝혀진 객관적 증거로는 배정자와 현영운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없다. 그렇기에 현송자는 배정자의 딸이 아니다.


    첫 번째로 일제 강점기 작성된 오케레코드 이철의 호적에는 현송자의 출생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배정자와 관련없음을 증명한다.


    호적에 따르면 1934년 9월 6일에 이철과 현송자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했으며 부인 현송자의 출생일은 1899년 5월 16일, 어머니는 이씨로 이미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기록상 명백하게 배정자는 현송자의 어머니가 아니다.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의 호적(부인 현송자의 출생일이 1899년 5월 16일로 되어있다)


     

    두 번째로 1916년 12월 8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현영운과 배정자가 결혼한 시기는 1901년이다. 1899년 생인 현송자는 배정자의 소생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배정자와 조병헌의 결혼기사를 다루는 매일신보의 기사에서 전 남편들에 관한 구체적인 결혼 시기가 언급되어있다. 더불어 현영운과 만남 및 이혼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친일문제 전문가인 정운현이 쓴 오마이뉴스의 배정자 기사(@ 이토 히루부미가 키운 조선의 '마타하리')에서는 현영운과 배정자가 1년여간 같이 산 것으로 되어 있으나, 앞의 기사에 따르면 현영운과 7년간(1901년~1907년, 기사 본문에서는 오륙년으로 명기)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사로 1907년 11월 2일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배정자가 현영운에게 버림받은 것으로 보도(매일신보에서는 배정자가 버린 것으로 명기)되어 서로 시기가 일치한다.


     괴물 배정자(1916.12.8 매일신보)



    마지막으로 1915년 12월 7일 현재 첫째 학자는 당년 26세로 사망하였다(매일신보). 따라서 1890년 출생으로 추정할 수 있고, 이 시기에 배정자는 아직 일본에 있을 때이며 1894년에서야 조선으로 귀국한다.


    이처럼 객관적인 사실에서는 현영운과 배정자의 사이에 자녀가 없다.



     현학자 사망기사(1915.12.7 매일신보)




       그래도 남는 의문점



    1. 배정자는 왜 현영운과 이혼한지 27년만에 친딸도 아닌 현송자의 아들 돌에 참석했을까?

    (현송자가 어렸을 때 자식처럼 키운 정이었을까?)


    현영운은 왜 손자의 돌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배정자가 껄끄러워서 사진만 같이 찍지 않았을까?)


     이철 부부의 첫 아들 돌(1934년. 맨 왼쪽 앉은 사람 배정자, 맨 오른쪽 현송자, 맨 오른쪽 서있는 사람 이철)



    배정자가 이철부부의 아들 돌에 참석한 이유에 대해 지난 2009년 이철의 딸(1941년생)은 이렇게 증언했다.


    - 그래. 왜 배정자씨 등장했느냐면..
    어머니(현송자)가 그 외할아버지 원수부청장(육군참장) 시절에 그 일본과 아마 이런 관계가 있었던 걸로 음. 나는 확실히... 자세한..(내용은 모르지만...)


    - 그때 인제 배정자씨. 에 또 일본 일본과 관계가 있는 걸로 생각이 되요. 그래서 인제 외할아버지 관계로 해서 어머니가(말씀하시길) 이분(배정자)이 집을 자주 오셨데요.


    - 그래서 어머니가 어머니(할머니) 없이 사셨거든요. 그러니깐 어머(니), 에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 어머니 노릇을 많이 하셨다 이렇게 많이 들었어요.


    - 집에 가끔 오셔가지고. 그래서 여기서 배정자씨가 나타나 등장하는 겁니다.




    2. 배정자와 현송자의 같은 나이 무렵의 사진은 왜 서로 닮아있을까?


     

     좌측은 1905년 배정자(당 35세 경, "한국사진첩"에 수록된 상류의 귀부인 풍속 사진), 우측은 현송자(1934년 무렵, 당 35세 경)



    3. 호적이 객관적인 사실을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가령 예전에는 출생신고를 늦게 하면서 출생일이 다른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출생년이 다른 경우도 매우 흔했다. 


    더구나 현송자처럼 일제에 의해 호적이 정리(1909년 민적법 공포시행)되기 이전에 출생한 사람들은 기록의 정확도가 높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회에서 호적의 오류와 이철의 아들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 객관적인 기록으로는 배정자와 현송자의 혈연관계를 부정할 수 밖에 없다. 정황상 의문점이 있다고 뭐 유전자검사를 할 수도 없으니....




    계속>>> 1화. 사랑인가 불륜인가?


참고음악
듣기 추가 곡명 아티스트 가사 내보관함 좋아요
  • 김광우
    2000년 부터 가요114를 운영하였고, 옛노래를 찾아 전국을 헤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서 즐거운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더 알아보기
  • 이 글이 유익했다면 추천해 주세요.  
    1
댓글
크크 드디어 나서시는구먼요~~~!!! 진작 나서실 일이지...!! 격하게 응원합니다!!!
목록